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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와 포도의 브베이렇게 먹고, 다녀요 2021. 9. 1. 04:20
이번 주에는 쉬면서 가볍게 여행할 만한 곳이 있을까 해서 지도를 찾아보니 가까운 곳에 브베Vevey라는 곳이 있더라고요. 찾아보니 중간중간에 멈추는 기차로는 30분, 직행으로는 15분 밖에 안 걸려서 여유있게 아침도 잘 챙겨먹고 이제는 익숙해진 로잔역에 가서 열 시 반쯤 기차를 탔어요.
아침부터 레만호를 따라 기차여행을 하니까 이런 경치가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것도 좋은 삶이구나 싶었는데 막상 출근을 하고 여기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허공을 보고 있더라고요. 익숙해져서 감흥을 잃어 버린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어요.
브베역에서 내리니 생각했던 것보다 큰 규모의 시내라 놀랐어요. 지도를 보지 않고도 사람들이 걷는 방향과 빌딩들이 놓여있는 방식을 보니 어디가 호수인지 알 것 같아 길을 따라가 보니 탁 트이고 푸른 호수가 보이더라고요.
호수에 비치는 햇빛의 결마저 그림같이 예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호수로 계속 걸어가보니 조깅하는 사람, 책 보는 사람, 수영하는 사람, 다채롭고 평화롭게 이 호숫가를 즐기고 있더라고요. 찰리 채플린이 노후를 브베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왜 그랬는지 단번에 알 것 같았어요.
저도 같이 그 여유를 누려보려고 호숫 옆 산책로의 돌담에 걸터앉아 햇빛도 쬐고 유리병에 담아온 포도와 토마토를 먹으면서 책도 읽었어요. 건너 편에는 꽤 가까이 프랑스 쪽의 마을이 보이더라고요. 닻을 내린 보트와 모터보트들도 두둥실 떠 있어서 그 풍경을 완성해 주는데 그림을 보는 것 같았어요.
어린이들이 킥보드를 갖고 놀이기구 타듯이 푸니큘라를 타고 이 역 저 역에 내려서 놀더라고요! 스위스 산악 지방에 사는 어린이들의 일상을 보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한 동안 산책로를 따라 걷고서 호수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몽펠레렁 Mont-Pèlerin에 가려고 빨간 푸니큘라를 탔어요. 산 언덕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버스 타듯이 푸니큘라를 타고 시내에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듯 산 중턱에 층층이 자리한 마을들을 지나 806m 고도에 위치한 제일 높은 역으로 향하다 보니 귀가 멍멍해지더라고요. 역에서 내리니 완만한 경사로 산을 둘러싸는 길 옆으로 집들이 꽤나 잦게 서 있더라고요.
터벅터벅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길가의 집 지붕 위로 보이는 경치에 스위스 국기가 드리워지는데 너무나 스위스다운 풍경이었어요. 계속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는 옆 마을 까지 가서 길을 잃어 버릴 것 같아서 다시 푸니큘라 역으로 돌아가니 밑 쪽에 트레일이 있었어요. 지도를 보니까 그렇게 긴 트레일은 아닌 것 같아서 따라 가보니 꽤나 언덕진 트레일에 스니커즈를 신고 가려니 힘들긴 하겠다 싶으면서도 이런 동네 트레일을 언제 또 가 볼까 싶어 내려가 봤어요. 중간 중간에 보이는 경치가 때문인지 물을 많이 안 마셨는데도 갈증이 나지 않더라고요.
이 동네 집들의 앞마당, 뒷마당을 지나치며 걷다보니 꽤 자주 포도밭들이 보이더라고요. 찾아보니 스위스 와인은 프랑스나 이탈리안 와인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스위스 영토의 0.4%정도 조금 안 되는 면적이 포도를 재배하는 데 쓰이는데 나라 면적 당 규모로는 세계 10위에 드는 크기이고 매 년 1억 리터 정도의 와인을 생산 한다고 해요 (이탈리아는 일 년에 49억 리터를 생산한대요!). 아마 스위스 와인이 유명하지 않은 건, 1%의 와인을 독일로 수출 하는 것 말고는 대부분이 자국 내에서 소비되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브베에서 푸니큘라를 타고 빨간 선을 따라 몽펠레렁 역에서 내렸어요. 산 꼭대기까지는 하이킹 트레일이 있더라고요. 조금 더 지역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레만호를 따라 11km정도 되는 트레일을 라보 테라스Terrasses de Lavaux라고 하는데제가 간 몽펠레렁이 라보 테라스에서 제일 끝자락에 있어요. 언덕진 포도 밭들이 펼쳐져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된 이 지역은 12세기부터 와인용 포도를 제배했데요. 이 곳이 포도 재배에 유리한 이유가 하늘에 떠 있는 해, 이 층 진 테라스에서 나오는 열기, 그리고 호수에서 반사되는 빛, 이 '세 가지 해'가 있어서래요.
이 세 가지 해 때문인지 걷다보니 더워서 ㅋㅋ 중간에 발견한 역에서 다시 푸니큘라를 타고 브베로 내려갔어요. 찰리 채플린 말고도 브베에서 유명한 커다란 포크를 보며 점심을 먹으려고 샌드위치를 사서 다시 레만호로 갔어요.
밑에 작게 보이는 의자가 바위들 위에 여러개 놓여 있었는데 브베에서 바라던 대로 많은 사람들이 포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더라고요! 이 포크는 지구를 찍어 먹겠다는 느낌으로 레만호에 꽂혀져 있는데 ㅋㅋㅋ 높이가 8미터로 세계에서 제일 큰 포크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대요. 스위스 작가 장-피에르 조그가 네슬레의 음식 박물관의 10주년을 맞아 만든 작품인데, 브베의 지역 의원이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같이 이 포크가 브베의 상징이 되길 바라면서 이 지역 명물로 세워졌대요.
네슬레 음식 박물관에서 음식의 역사나 채식주의에 관한 특별전도 재밌었지만, 이 뷰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이 날은 햇빛마저 완벽한 각도로 내려쬐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다른 곳들 보다 더 많이 본 것 같은데, 왜 찰리 채플린이 이 곳에서 여생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어요. 브베는 또 갈 것 같아서 많은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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